
비디오 대여점이 전성기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곳의 풍경은 마치 서점처럼, 비디오테이프를 담은 케이스들이 열 맞춰 진열장에 들어찬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케이스에 실린 영화 홍보 내용이 영화 선택의 기준이었다. '파리대왕'의 첫 만남도 그랬다. 케이스 전면에 원시인의 모습을 한 소년의 모습도 그렇고, 우스꽝스러운 제목에 그냥 스쳐만 갔던 기억이 난다.

1954년 출간된 영국의 작가 윌리엄 골딩의 작품인 '파리대왕'은 무인도에 표류한 소년들을 소재로 한 소설이라, 얼핏 소년들의 모험소설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야기의 초점은 그곳에서 벌어지는 소년들의 갈등 양상에 맞추고 있다. 작가는 양차 대전이 끝난 후 인간의 내면에 대한 회의 속에 이 소설을 내놓았고, 이를 인정받아 198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순수의 상징인 소년들을 등장시켜 그들이 점점 타락하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평화가 무너지면 인류가 어떻게 공멸하는지를 보여준다. 줄거리는 이렇다.

무인도로 추락한 비행기에서 생존한 랄프와 돼지가 만난다. 랄프는 소라껍데기를 불어 여기저기 생존한 소년들을 불러 모아 그들의 대장이 된다. 그때 성가대원을 이끄는 잭이 등장하자, 랄프는 그에게 사냥꾼의 자리를 주어 포섭한다. 랄프는 구조와 생존을 위해 봉화와 오두막을 짓자고 제안하지만, 소년 대다수는 랄프의 지시에 따르지 않고, 잭은 사냥에 집착한다. 그러던 중 소년들 중에는 짐승을 보았다며 두려움에 떤다. 랄프와 잭은 짐승을 찾아 숲 속으로 들어갔고, 짐승의 그림자를 본 랄프는 겁에 질린다. 그런 랄프의 허점을 본 잭은 대장이 되려 하지만 실패하고, 그의 무리를 이끌고 숲으로 들어가 요새를 구축한다.
한편, 사이먼은 홀로 숲을 탐험하다 환상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벗어날 수 없을 거라는 파리대왕을 만나며 기절한다. 깨어난 사이먼은 짐승의 실제가 비행기 조종사의 시체임을 깨닫고, 이를 알리러 소년들에게 간다. 그사이 잭은 멧돼지를 잡아 고기로 소년들을 자신의 편으로 유인한다. 랄프마저 빠져들어 광란의 잔치를 하던 중, 짐승의 존재를 알리러 온 사이먼이 잭의 무리에 죽게 된다. 랄프는 숲에서 도망치고 구조를 위해 노력하지만, 고기를 먹기 위해 불이 필요한 잭 무리에게 불을 뺏긴다. 이를 따지러 온 랄프 일행은 잭의 공격을 당한다. 돼지는 죽고, 랄프는 잭 무리에게 쫓기게 된다. 랄프를 쫓던 잭 일당은 숲에 불을 지르고 마는데, 이를 지나가던 해군이 발견한다. 해군은 랄프와 곧이어 나타난 잭 일당은 보고 놀이를 하는 걸로 생각하지만, 해군을 만난 소년들은 모두 울음을 보인다.

‘파리대왕’은 주인공이 소년들일뿐, 다분히 사회성이 강한 소설이다. 인물 하나 하나와 그들이 처해진 상황, 사건들은 인간 세계의 축소판이다. 마치 무인도라는 제한된 공간의 사회 실험실 같기도 하다. 작품에 나오는 인물과 물건, 상황까지 인간 세계의 비유와 상징을 내포하는 것으로 '파리대왕'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섬에서 탈출을 위해 행동하는 랄프는 궁극적 목표를 추구하는 문명인을, 사냥과 고기를 쫓는 잭은 단순한 본능만 추구하는 야만인을 의미한다. 불과 안경은 문명의 이기들로 봉화처럼 잘 사용하면 인류를 위한 도움이지만, 숲을 모두 태우는 것처럼 인류를 공멸로 가져올 수도 있다. 짐승의 존재라는 두려움의 원천에 대해서 랄프는 극복하기 위한 권력을 사용하지만, 그에 반해 잭은 공포로 이용해 무리를 다스리는 권력 행사를 한다. 실제 정치에서 무수히 봐온 권력의 모습들이다.
소설 속 인물들도 실제 존재들의 상징이다. 랄프는 문명인이자 평화적 정권의 권력자로, 잭은 야만인이자 폭력적 정권의 독재자다. 돼지는 뛰어난 지식으로 랄프에게 가감 없는 조언을 하지만, 막상 행동에는 한 발 빼는 존재로 언론이나 지식인으로 읽힌다. 권력에 따라 움직이는 샘, 에릭 쌍둥이는 소시민을, 나이 어린 소년들은 일반적인 대중의 상징이다. 그런 인물 사이에서 사이먼은 종교인처럼 느껴진다. 파리대왕으로 상징되는 악과 타락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사이먼은 짐승이라는 비현실적인 존재를 현실의 실재로 직시하고 진실을 알린다.

내용도, 비유와 상징이 나타내는 바도 비교적 선악 구조가 확실한 내용이다. 선은 랄프로, 악은 잭임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해군(어른)을 만난 후 모두 울음을 짓고 만다. 어른에게 소년들의 세계는 중요하지 않다. 그냥 놀이로 알 정도다. 결국 선과 악도 사회 구성원들 스스로가 규정하는 것이며, 그 안에서만 대립인 것이다. 더 넓은 시야에서 본다면 내부의 극심한 대립도 그저 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항상 견지해야 한다.
- 저자
- 윌리엄 골딩
- 출판
- 민음사
- 출판일
- 2002.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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